(단) 동굴에서

by 벅벅그릇  /  on Dec 23, 2012 16:36

 

[동굴에서]

 

 

"똑!"

 

차갑다- 라고, 인식한 순간, 로빈은 번쩍 눈을 떴다. 관자놀이로 한방울씩 떨어지고 있던 물방울은 어느새 그의 검은 머리칼을 흠뻑 적신 후였다. 로빈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숨을 죽이고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음향이 퍼져나갔다. 텅 빈 공간. 감은 눈을 떴지만 어둠만 계속되었다. 거칠어지려는 숨을 억누르며 훈련받은 대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먼저 기억부터 더듬어봐야 했다. 여기는 어디지? 난 무얼 하고 있었지?

 

"똑!"

 

물방울이 다시 한 번 관자놀이를 적셨다.

기억이 돌아왔다.

 

"...! 브루스?!"

 

벌떡 일어나다가 쿵 하고 낮은 천장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동굴 탐험을 위해 쓰고 있던 헬멧 덕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잠시 머리가 지잉 울렸다. 두 팔로 바닥을 짚고, 로빈은 팔굽혀펴기도 할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에서 숨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배트케이브가 고담시 지하로 통하는 수많은 동굴들 중 하나란 걸 알게 된 이후로, 배트맨과 로빈은 틈이 나면 동굴 탐험에 나섰다. 좁은 통로 끝에는 낡은 건물로 통하는 비상구가 있기도 하고, 야트막한 산등성이에서 별을 볼 수 있기도 했다. 유용한 정보라면 무엇 하나 남기지 않는 성격대로, 배트맨은 동굴 탐험의 결과물들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도시 전체로 통하는 비밀 통로, 또는 은신처로. 처음엔 그 혼자 해냈지만 로빈과 한 팀이 된 후에는 항상 2인 1조로 움직였다. 

지금 로빈은 혼자였다. 이런 일은 발생해선 안되는 거였다.

 

"배트맨!"

 

로빈은 서둘러 몸에 묶었던 연결 케이블을 찾았다. 케이블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진 몰라도, 그의 할 일은 하나였다. 로빈은 이를 악물고 케이블을 따라 기어가기 시작했다.  

탐험 중에 배트맨과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동굴 탐험에서 팀이 헤어지는 건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위험 상황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고담시에서 가벼운 지진이 일어난 건 평소라면 그다지 큰 일이 아니었다. 마침 배트맨과 로빈이 좁은 동굴 틈새를 탐험하고 있을 때라는 게 문제였다. 로빈은 초조하게 바닥을 기어갔다. 상대적으로 슬림한 자신도 아슬아슬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만큼 좁은 돌 틈에서 배트맨이 과연 아무 일 없이 안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호흡을 일정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졌다. 어째서 줄 반대편에서 아무 느낌도 전해오지 않는 걸까.  

배트맨...!!

 

"허억-!"

갑자기 넓어진 동굴 끝에서 고개를 내밀고, 로빈은 거대한 공동에서 밀려올라오는 차가운 공기압을 느꼈다.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을 뒤져 야광봉을 하나 꺼냈다. 절대 그럴 리 없으리라 믿으면서 야광봉으로 깎아지른 동굴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배트맨...!? 브루스, 괜찮아요?"

 

괜찮지 않다. 케이블은 중간에 끊겨 있었다. 끊기기 직전에 박아 넣은 듯한 못을 절벽에 단단히 매달고.

 

"-배트맨!!!!"

 

찢어질 듯한 로빈의 비명이 공동을 메아리치며 사라지는가 싶다가 갑자기 기괴한 음성으로 변해 되돌아왔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입에 올리는 듯한 "배트맨"이란 부름에, 로빈은 몸서리를 치며 바닥을 긁었다. 안돼. 믿을 수 없어. 그럴 리 없어!

 

"알...알프레드. 알프레드?!"

 

통신기는 먹통이었다. 어딘가 고장났던지, 범위를 벗어났든지 했을 것이다. 로빈은 통신기 대신 GPS 기능을 활성화 시켰다. 만약 배트맨이 범위 내에 있기만 하다면 배트케이브와 통신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있었다! 바로 저기에! 저 아래에! 저-

 

지옥처럼 입을 벌린 공동 어딘가에!!

 

"배트맨! 내가 갈게요!!"

 

형광 물질을 벽에 문질러 표식을 남기고, 로빈은 회수한 케이블을 이용해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헤어진 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몇 분이 지났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신체 리듬으로 보아 네 시간 이상 지나진 않은 게 틀림 없었다. 혹시나 정신을 잃은 채로 어딘가의 바위틈에 기어들어가 있진 않은지, 로빈은 수시로 어두운 공동을 내려다 보았다. 고담시의 바닷가까지 이어진 듯이 희미한 바닷냄새가 났다. 만약 물 속에 떨어졌다면... 혹은 저체온증으로... 또는...

 

"그럴리 없어!"

 

일부러 소리내어 자신에게 못박듯 짧게 외쳤다. 브루스는 다치고 납치당하고 기억을 잃기도 하지만 언제나 돌아왔다. 언제나. 그것만 기억해야 했다. 케이블의 거의 끝까지 내려와서, 로빈은 엉덩이 하나 간신히 걸칠만한 틈새에 주저앉았다. 땀으로 온 몸이 범벅인데다 팔다리도 후들거렸다. 로빈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태를 먼저 돌봐야 한다고 가르침 받았다. 그 가르침을 강요한 상대방은 정작 누구를 위해서나 자기 목숨을 걸어버리곤 하지만. 로빈은 어쨌든 그 가르침대로 소금기가 있는 음료 한 모금과 초콜릿 한 조각 크기의 에너지바를 입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3일은 버틸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3일이나 버텨야 할 리가 없다.

 

브루스는 저 아래에 있을 것이다.

 

그는 금방이라도 손이 닿을 곳에서 로빈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로빈은 자신이 기어내려온 절벽을 올려다 보았다. 저 정도 높이에서 브루스가 떨어졌다면...

 

"그럴...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절대로. 그렇지 않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절대로 로빈을 버리고 가지 않는다. 버리지 않는다. 죽어버리지 않을 거다. 그래도 무서워서.

 

"배트맨! 배트맨! 배트맨!"

 

주문을 외우듯 외친다. 넓은 공간에서 되풀이되는 비명이 메아리와 섞여 웅웅거리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로빈은 차가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흐느꼈다. 배트맨. 배트맨.

 

맙소사.

 

"제발, 아무 소리나 내 줘요! 힌트라도 줘요! 제발! 브루스! ...브루스...!"

 

비명은 비명에 밀려 사라졌다. 간절한 외침은 외침에 밀려 사라졌다. 로빈은 넓은 공동을 메우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거였다.

 

로빈은 두 팔로 몸을 감싸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지리란 걸... 정말로 몰랐었나?

 

언젠가 배트맨이 자기 눈앞에서 쓰러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정말로 없었나?

 

조커, 투페이스, Mr 프리즈,  클레이페이스, 그 놈들의 계략과 총탄 앞에서 저 고귀한 남자가 결국은 쓰러지리란 악몽을 매일같이 꾸지 않았나?

로빈을 구하려다가 등 뒤에서 총에 맞는 그를 떠올린 적이 없었나?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박쥐의 망토를 상상한 적이 없었나?

배트 모빌이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폭발하는 장면에서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 적이 언제였지?

아름다운 얼굴을 한 암살자가 그의 입술에 독을 흘려넣는 상상에 진저리친 건 또 언제고?

 

"아니야...!"

 

이런 죽음은 아니었다. 사고로, 그래, 사고로 죽을 수도 있지만, 이런 죽음은 아니었다. 이런...이런 식으로는...이렇게...

 

"내 손으로 당신을 거두지 못하는 상상은 해 본 적 없어...!"

 

그 어떤 죽음에서도, 그 후에 로빈은 쓰러진 배트맨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를 끌어안고, 이제야 자신의 두 팔에 감싸안을 수 있는 거대한 남자를 위해 울었다. 그 눈물 속에는... 이제 더 이상 그를 잃는 상상에 지치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하는 자신이 있었음을 알기에, 더더욱 울음으로 진심을 덮었다. 그 시체가 주는 무게감에 안도하며.

 

그것이 필요했다. 그의 시체. 그의 죽음의 증거.

 

이렇게 사라지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저 깊은 어둠에 모든 걸 묻어야 한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브루스-!!!"

 

두 주먹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른다. 제발, 브루스. 배트맨. 아버지. 제발!!

 

"...로...!"

 

희미한 외침. 로빈은 형광봉을 꺼냈다. 희미한 불빛을 천천히 흔들었다.

 

"브루스!"

 

그리고 발 아래 먼 어둠 속에서 옅은 초록색의 불빛이 희미하게 솟아오른 걸 보면서, 로빈은 그제야 안심했다. 이번에도 그는 안심했다.

 

배트맨은 바로 저기에 있었다. 그가 손 내밀면 닿을 곳에. 그리고 그의 시체도 결국은 로빈의 것이 될 것이다.

 

 

 

 

*********************************************************************

 

 

....왜 이런 걸 올리냐면...

 

 

포인트가 떨어졌...TT 댓글 달려는데 쫓겨났...TT

 

Comment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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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from. [레벨:15]title: 다영 twentysix   on 2012.12.29 10:36
    overly attached Robin!!
  • No Profile
    from. [레벨:0]title: 탤론 정핕   on 2013.01.16 01:06
    슬프네요 ㅜㅠ 뭔가 마음이 뭔가...설명을 못하겠는데 씁쓸하네여 새드엔딩 ㅠㅜ 소설 잘보고 갑니다
  • No Profile
    from. [레벨:0] 벅벅그릇   on 2013.01.16 11:53

    ...에? 새드.....인가요? 긁적.

  • No Profile
    from. [레벨:6] 달팽이   on 2015.06.21 17:18
    헝.. 동굴탐사라니.. 그런데 동굴탐험도 코스튬을 입고 하나요??
    +로빈의 상상력은 정말 끝이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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